2010. 11. 27. 01:14ㆍ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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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然至是殺之 時年二十六’
이 글을 본 것은 좋아하는 작가인 김연수씨의 ‘청춘의 문장들’에서였다.
조선시대에 朴誾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18세에 文科에 급제를 하고 곧고 정직하여 왕의 猜忌를 사서 죽게 되었으니 그 나이는 26살이었다라는 내용이다.
지금 내 나이는 만으로 하여 26살이다. 이 말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 때는 22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년간의 空白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4년은 훌쩍 지나가 猶豫期間은 다 消盡되고 말았다.
박은이라는 사람이 급제한 18살에는 대한민국 수험생들이 그렇겠지만, 급제라고 할 만한 대목도 없었고, 오히려 울분과 화만 가득하게 쌓여갔다. 목구멍까지 쌓여 토해내고 싶은 때였다.
나는 그 편지에서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하게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당시의 내 깊은 우려 중의 하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평균치의 삶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솔직하게 썼다.
- 이문열,「젊은날의초상」中
그 때 이문열씨는 대학 입학 전이었던 거 같은데 갓 대학에 입학한 나는 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때는 너무도 세상이 싫어 삶에 叛逆할 요량으로 광진교로 향했다. 어두운 밤에 도시의 빛에 물결 틈에서 어스름 비치는 수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허무와 슬픔 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공포라는 감정은 멀리 있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고, 戀愛感情에만 빠져 여자친구와 있는 시간만을 즐겼다. 집에서 나와 살았으며 1학년 때는 학점이 좋았지만 내 안의 화와 외로움이 번갈아 쌓여가고 있었고, 그 때 당시 未熟했던 나를 여자친구는 많이 이끌어 주었다.
평균적인 한국 남자라면 다 알 테지만, 어쨌든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면 삶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 뭐, 총검술이라도 미리 연습한다면 좋은 계획이 될 듯도 하지만, 그런 인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 해서 군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에게서는 달관의 풍모가 느껴진다. 뭘 열심히 파고든다고 해도 입대하면 말짱 헛수고라는 걸 알기 때문에 무엇에도 열중하지 못한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나는 입대 전 2학년 1학기 때 수업도 빠진 채 여자친구와 수 많은 밤을 지새웠고, 學士警告라는 딱지를 받고 군대를 들어갔다. 그리고 訣別. 아무런 感情도 들지 않았다. 아쉬운 것 딱 하나가 있다면 좋은 친구를 하나 잃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나에게 여행의 방법, 책을 읽는 방법, 홀로 즐기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던 친구였으니 말이다.
결국 지금의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삶에 叛逆하려는 은밀한 計劃보다는 좀 더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발버둥이다. 하고 싶은 것을 찾기까지는 ‘然至是殺之 時年二十六’가 마음 속에 자리잡은 후 지금까지의 4년이었다.
대학교 들어와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지만 이문열씨의 ‘젊은 날의 초상’은 이번에 精讀하게 되었다. 文學수업이 주는 즐거움일 것이다. 이문열씨 작품 중에 내용이 생각나는 것은 ‘選擇’이었다. 페미니즘이 한창 시끄러울 때 읽어서 그런지 더 기억에 남는 책이었다. 그러면서 굳어진 것은 이문열씨는 過去 사람이다라는 거였다. ‘選擇’에서 나오는 교훈은 수긍할 만한 것들이 많음에도 너무도 구식이고, 힘이 잔뜩 들어간 글이었다.
하지만 ‘젊은 날의 초상’을 읽으면서 이문열씨도 靑春일 때 지금의 靑春들과 같은 苦悶을 했구나하는 생각에 친근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서 죽든 일찌감치 독약을 마시든 하라.
- 이문열,「젊은날의초상」中
이문열의 젊은 날은 省察을 위한 방랑이고 여행이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Woher sind Sie)?'라는 질문을 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방랑같은 無錢여행이었다. 그는 혼자 省察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만나며 배웠다.
시인들이 흔히 노래해 온 것처럼 삶이 하나의 긴 여행이라면 그 굽이굽이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또한 길동무로 부를 수 있으리라. 그들 중에는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스쳐가 버리는 사람도 있고, 또는 첫만남의 서먹서먹함이 가시기도 전에 헤어져 종내에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너무나 갈림길을 빨리 만나 가슴 속의 애틋한 연모를 미처 드러낼 겨를도 없이 잃어버리고 만 첫사랑의 소녀나, 우리가 준비없이 맞닥뜨린 삶의 비참과 공허에 시달릴 때 빛처럼 다가오던 말씀과 지혜의 스승들, 또는 거칠고 외진 세월의 길목에서 그 쓰라림과 외로움을 함께 나눈 지난날의 벗들처럼 그 어떤 시간의 파괴력으로부터도 살아남아 문득문득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이들이 있다.
- 이문열,「젊은날의초상」中
나 또한 삶은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만나는 因緣을 소중히 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尊敬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인생을 소중히 살아가는 여행객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여행객이기 때문에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다 소중한 것이다. 그들은 내게 늘 가르침을 준다. 특히 인생을 희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울린다.
이문열씨가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여행을 택했었다.
세상을 경험하고, 고생해 보고 싶다는 단순한 稚氣로 시작하여 뉴질랜드행을 결정하였다. 가진 돈은 딱 비행기표와 3개월 정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나는 나를 확인하고 싶었다.
대학 입학 후부터 홀로 살아온 나는 외로움에 익숙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誤算이었다. 혈혈단신으로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고비는 외로움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외로움의 모습은 초등학교 시절인데, 부모님이 맞벌이하고 반지하방에 살던 시절이었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아무도 없이 동생과 같이 쓰는 큰 방에 광목이불은 그대로 깔려 있었고, 반투명의 창문으로 희미한 노란빛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고물상에서 얻어온 세계문학전집 따위를 들고 홀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첫 외로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애틋하기도 하고, 행복한 느낌마저 담고 있었지만 타국에서 맞은 그리움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속에 열어놓을 줄은 몰랐었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일에는 우울하였지만 타국인지라 좀 튀는 행동을 해서 스스로 위로 받고자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 길을 나섰다. 펜과 노트를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생일이라고 말하고 메시지를 받기로 했다. 이방인의 特權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방인에게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용기가 생겨서 근처 큰 공원을 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마지막으로 만났던 친구는 스페인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는 뉴질랜드에 있던 10개월동안 단 3번 만났지만 아직도 연락하고 있다. 친밀함은 만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젊은 날의 초상’을 읽으면서 즐거운 부분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카페에서 책을 읽으면서 피식거린 부분이 있었다. ‘5. 주점 쩌그노트의 추억’ 부분이었다. 술을 진탕 마셔대며 虛妄하게 보내면서도 깊은 追憶거리가 되는 부분이었는데 청춘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는 유쾌한 부분이었다. 주변 인물들도 다 어려운 대화를 하는 이상한 소설 속에서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을 만난 것은 매일 학교 밥만 먹다가 외식하는 기분이었다. 謹嚴하기만 할 것 같은 사람이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다가가기 쉽게 해 주는 통로 역할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 부분 이후로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문열은 결국 바다에 도착하였고, 바다에 삼켜진 갈매기를 보고 자신의 가엾은 存在에 대해서 느끼게 되었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바다 역시도 지금껏 우리를 현혹해 온 다른 모든 것들처럼 한 사기사에 지나지 않는다. 신도 구원하기를 단념하고 떠나버린 우리를 그 어떤 것이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갈매기가 아니고, 존재가 그 지속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 이문열,「젊은날의초상」中
우리는 존재하고 살아가는 인생이기에 날아야 한다. 존재가 없으면 不在도 확인할 수 없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우리 인생은 절망일 때도 있지만 참고 비워야 하는 것이다. 觀念이나 風習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던 이방인의 삶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던 때였다. 이제는 살 수 있겠구나,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든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치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인생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가다보니 선택의 순간이 있었을 뿐이고 그 순간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많지 않았다. 가령 컴퓨터를 전공하던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앞날은 많지 않다. 그 사람이 갑자기 등단을 하게 된다거나 유치원 선생님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다. 전 세계 바다를 떠도는 遠洋漁船의 船員이 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다. 차라리 IT業界에 취직하여 일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수많은 變數가 있었고, 컴퓨터를 전공하던 사람이 유치원 선생님이 되려는 일도 존재한다. 이것은 내 이야기이다. 생이 우리를 선택하는 경우였다. 이문열씨 같은 경우에도 작가가 된 것은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然至是殺之 時年二十六’
점점 배워가고, 살아가는 가운데 42세 즈음에 내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어린 나이에 등단한 작가가 있는 반면에 나이 들어서 등단하는 작가가 있듯이 朴誾은 18살에 장원 급제 했지만 나는 42세에 인생 급제하여 누구의 시기 사는 일 없이 낭창낭창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네 인생은 연약하여 보잘 것 없지만 마음에 꿈을 품고 살아간다면 어느 누구라도 빛나는 새벽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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