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규, 『트렁커』

2011. 2. 4. 15:20

트렁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고은규 (뿔,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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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카페 스펙업에서 소설증정 이벤트가 올라왔길래 덜컥 신청했다. 자기계발 서적은 끌리지 않지만 좋은 소설이라면 소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근사한 책장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인문과학 서적이야말로 소장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의 취향에 따라 소장하고 있는 책들이 많이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근사한 책장을 가진 지인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의 취향을 책장을 통해 읽을 수 있으리라.

내 친구 중에는 책장은 아니지만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보면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유독 자기계발 서적과 위인전 따위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진취적이면서 리더십을 갖추기 원하는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최근에 인문학 서적을 계속 읽다보니 소설을 자주 못 읽었는데 이 책을 받고 심심풀이로 읽기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설이고 해서 천안 내려가는 동안 읽기 위해서 책을 챙겼다. 급행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다 읽게 되었는데 그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짧은 게 흠인 것인지 내가 소설을 빨리 읽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아쉬운 느낌이 없잖아 있다.

 

이 책의 제목 <트렁커>. 그 뜻은 멀쩡한 집 놔두고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제목에서 내용을 짐작해 보자니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이라니 세계문학상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1억원 고료라고 한다. 1회는 어떤 작품이 수상했는지 모르겠다. 중앙장편문학상은 생소하다.

 

나는 그린타운 414동 앞에 서 있다. 304호는 어둠에 잠겨 있다. 그가 돌아왔다면 불이 켜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살아갈 수 있다. 지금처럼 건조하고, 밋밋하고, 윤기 없고, 지루하게.

 

이 책의 주인공인 온두. 건조하고, 밋밋하고, 윤기 없고, 지루하게 살아가는 유모차 판매원이다.

그리고 트렁커이다. 어떠한 과거의 사건으로 인하여 트렁크가 아니면 잠을 잘 수 없게 된 기구한 여자이다.

 

“내 이름은 이름입니다.”

“이름이 이름인가요?”

“네.”

“내 성명은 성명이에요.”

남자는 웃지 않았다.

“나는 온두예요. 이온두.”

남자의 얼굴에 활기가 느껴졌다.

 

어느 날 자신만의 공터 가운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 남자의 이름은 이름. 그도 역시 트렁커이다. 어떠한 사연을 가진 남자가 그 여자의 삶에 들어왔다.

 

“저기저기, 뭐 하시는 분이에요?”

“......”

“그러니깐 직업이 뭐냐고요!”

름은 나를 바라보았다.

“빌딩 밸런시스트입니다.”

“처음 듣는데요.”

“네, 알려진 직업은 아니죠. 건물의 균형을 관리하는 일이거든요.”

 

남자의 직업은 빌딩 밸런시스트이다. 건물의 균형을 측정하고 관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남자의 직업이 빌딩 밸런시스트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소설에서 완전하게 홀로 똑바로 선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손님이 왔을 대 나는 중얼거림을 멈췄다.

삼십 대 후반의 여자였다. 아기는 울다 지쳐 잠든 것 같았다. 아기의 머리와 몸은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아기 엄마의 몸은 균형을 잡기 위해 오른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려 있었다 위태로운 모자, 혹은 모녀가 납시신 거다.

 

그러나 문득 름에게 부러운 감정이 생겼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그는 과거를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는 거였다. 또 다른 하나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그 두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송 씨가 말한 대로 나는 가시두더지인지 모른다. 기억에 대한 과잉 방어를 하는 가시두더지 말이다. 그런데 그 뾰족한 가시는 누굴 향하고 있는 것일까. 외부 세계가 아닌, 바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빌딩이 기울면 조치를 취하나요?”

“쉽게 말하면, 기우는 반대쪽에 힘을 실어줘야 해요. 안 그러면 무너지죠. 사람이나 건물이나 몸과 마음이 기우는 쪽이 있어요. 그 끌림이 사랑일 때도 있고, 증오나 분노일 때도 있죠. 무너질 것들은 서둘러 무너져라, 그것이 내 생각입니다. 다들 밸런시스트들과는 생각이 다르죠.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만으로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과거를 온두에게 꺼내 놓는다. 그런 름을 온두는 부러워 한다. 자신의 끔직한 과거는 기억하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름과 게임을 통해 일방적으로 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신의 과거를 회복한다.

 

“양해를 구했어요. 대신, 나는 경주에 있는 모든 탑을 조사했습니다. 그중 균형을 제대로 잡고 있는 탑이 몇 개인 줄 아세요. 완벽한 균형은 없었어요. 모두 조금씩 기울고, 비틀어진 상태예요. 탑뿐 아니라 현대식 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은 그걸 확인하지 못할 뿐이죠.”

 

모든 사람들 가운데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 치유의 방법으로 작가는 감춰진 아픔을 끄집어내고 당당하게 마주 볼 때 극복된다고 말한다. 상처받은 마음을 가둬두면 곪아서 썩는데 그것을 드러내 보이면 객관화가 되어서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는 일리있는 말이지만 그것을 꺼내 놓을 상대를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심각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 책을 보면서 좀 오글거리는 것들이 내용이 있었다.

인연 혹은 필연이라는 설정 비스무레 한 것이 있었는데, 소설이라고 해도 오글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소설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보면 될 것을 말이다. 내가 소설에서 현실을 찾으려는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둘은 트렁크를 빠져 나오게 된다. 좀 고리타분한 설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상처를 내보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숨기고 혼자 앓으면서 살만큼 우리는 미성숙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작가가 상처를 내보이고 털어놔야만 치유가 된다고 말하니까 아는 거 또 말하네 하는 심정인 거다.

 

오랜만에 가볍게 읽은 소설인데 딱히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지금 읽어야 할 인문학 서적을 다 읽고 나면 검증된 고전 소설을 꾸준히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