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2011. 1. 27. 11:30ㆍ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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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토론회에서 김훈의 신간, <내 젊은 날의 숲>을 하려고 했는데, 박완서님께서 별세하셨다고 하셔서 진행자가 이 책을 선정하게 되었다.
이 책은 산문집이다. 토막글들을 싣어 놓았는데, 글들을 읽다보면 박완서씨의 특유의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박완서씨는 시절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글 하나하나에 그 시절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녹아있으면서 어쩜 그리 그 기억이 선연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묘사가 치밀하다.
박완서님의 책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나 <그 남자네 집>에서 보면 시골뜨기의 삶과 박완서님께서 서울 상경한 후의 전란 쯤의 삶이 그려져 있는데, 그 책에서도 묘사가 세밀하여 쉽게 상상 속에서 그 풍경을 그려볼 수 있다.
어렸을 적 우리 시골에선 분꽃이 시계였다. 분꽃이 벌어질 무렵 겉보리 절구질을 시작하면 저녁 짓기에 꼭 알맞다고 했다.
마을엔 통틀어 괘종 시계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 늙어서 오락가락했다. 사람들은 시계 없이도 자연이나 자신의 감각을 통해 시간을 잘 맞췄다. 그래도 귀한 손자를 본 노인은 밤중에도 시계 있는 집 문을 두드려 정확한 생시를 알려고 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누구나 그 늙은 시계를 귀물처럼 아꼈었다.
내 어렸을 적에도 뒷마당에는 분꽃이 나팔꽃과 함께 참 많이도 피었었다. 하지만 분꽃이 벌어질 무렵으로 시간을 가늠한다는 그런 시골의 정취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8월 한가위만 하여라"라는 우리의 옛 속담은 8월 한가위의 풍요를 말해주기보다는 8월 한가위를 뺀 허구한 날의 허리띠를 졸라맨 궁핍을 말해주듯이...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박완서님은 삶의 이면을 잘 바라보는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한 평생,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라는 말은 수많은 다른 날들의 부족함을 말해 주는 또 다른 문장 아닌가...
그리고 나의 어린 날을 떠올리게 하는 산문도 있었다.
<그까짓 거 내버려 두자>라는 제목의 산문이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동행을 할 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다른 점에 대해서 쓴 글이었다.
회상해 보니 어릴 적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던 기억이며, 5살 즈음 된 어린 꼬맹이가 혼자 유치원 갈 수 있다면서 엄마는 집에서 쉬라고 하면서 길을 떠났던 기억, 그리고 오는 길에 문방구 앞에서 동네 형들이 오락하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늦게 들어왔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어린이대공원에서 길을 잃어서 울던 기억, 아무리 학교와 집이 가까워도 운동장에서 놀고 문방구에서 군것질을 하다보면 동생보다 집에 먼저 들어가는 날이 없었던 기억.
이렇게 박완서님의 글은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하다.
박완서님은 1931년 10월 20일에 태어나셔서 2011년 1월 22일에 떠나셨는데, 1971년에 쓴 수필의 마지막에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라고 하셨는데,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한다.
가난한 문인들에게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셔서 부조를 받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후배사랑이 지극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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