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새의 선물』(이글루스에서 이동)
2010. 10. 15. 00:51ㆍ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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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6살 때 어머니를 여읜 진희는 할머니, 결코 어른스럽지 않은 궁상스러운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삼촌은 서울에서 공부를 하며 가끔 내려오곤 한다.
진희의 집에는 우물가를 두고 세를 살고 있는 여러 식구들이 있다.
남의 험담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장군이네 엄마, 그리고 엄마의 기대를 받고 살지만 의뭉한 장군이.
장군이네 집에 하숙하고 있는 능글맞은 무용선생인 최선생. 그리고 조용하게 살지만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정여사와의 알 수 없는 비밀을 지닌 이선생.
자신의 슬픈 삶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광진테라 아줌마, 능력없는 광진테라 아줌마의 남편 등등.
여러 사람들과의 얽힌 에피소드 가운데 진희의 눈으로 보는 삶의 통찰은 무척 재미있다.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 21p中
어린 진희는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자아를 분리시켜 '보여지는 나'를 수모를 받는 곳에 세우고, 진짜 나인 '바라보는 나'는 그것을 담담하게 바라봄으로서 상처를 덜 받게 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된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 123p中
할머니와 이모를 보면 궁상맞은 이모와 할머니는 늘 대립한다. 할머니에게 늘 야단맞는 이모에 대해서 가끔은 이모의 응석을 받아주는 할머니를 보며 하는 진희의 통찰이 놀랍다.
나는 이런 장면을 가끔 상상하곤 했다. 기우제 때 처녀를 바치는 제단이 있다. 비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쳐야 하는데 처녀라고는 이모와 나뿐이다. 이때 할머니는 우리 둘 중에 과연 누구를 그 컴컴한 동굴 속에 집어넣을까.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놀랍게도 나였다.
- 124p中
손주 사랑이 아무리 지극하고 망나니 아들이 있다 하여도 할머니는 망나니 아들을 택함을 나는 알고 있다. 어린 마음은 그것을 알았지만 진희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됨을 발견하며 마음을 붙잡는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읜 진희의 마음에 동요는 일어나고 진희는 그 감정에 짜증을 낸다.
나는 짜증이 난다. 아무 잘못도 없이 나에게 극복해야 할 상처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어른들에게 적의가 생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루어진 부모의 인연으로 인해서 왜 이런 과제들을 짐져야 하는 것인지 부당하다. 나는 지금 엄마와 아버지 생각으로 마치 돌덩이가 얹힌 듯이 가슴속이 묵직한 것이었다.
- 127p中
그러나 이런 진희도 어린 면이 보이는데 그 모습을 발견할 때는 귀엽기도 하다.
전문가들이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 엄정한 결과를 공식적으로 남긴 문건, 즉 성적표에도 그것은 명확히 나타나 있다.
- 이해력이 빠르고 추리력이 비상합니다. 남을 보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구간에 신망을 얻으며 이지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작년 성적표에 적혀 있던 말이다. 열한 살 때 나는 이미 '이지적'이었던 것이다.
- 147p中
삼촌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삼촌의 친구는 이모에게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모가 경쟁상대가 된다고 할 때 자신이 이모에게 처지는 점은 나이차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렇지만 자신은 이지적이기 때문에 그 나이차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삶의 비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희는 이모와 육군 상병 이형렬의 연애를 보면서 사랑과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통찰하기도 한다.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편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타인을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모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 304p中
늘 감상적이고 낙천적인 이모를 보면서 하는 진희의 생각이다. 삶에 대한 비판적인 냉소가 엿보인다.
삶의 양면성을 깨닫고는 기쁜 일에 항상 기뻐할 수 없음은 그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삶이란 장난기와 악의로 차 있다. 기쁨을 준 다음에는 그것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기쁨을 도로 뺏어갈지도 모르고 또 기쁨을 준 만큼의 슬픔을 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너무 기쁨을 내색해도 안 된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 중략 ...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 310p中
한 순간의 착각으로 인해 삶의 경고를 깨닫는 진희는 삶을 더욱 냉소적으로 보게 된다.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래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혀졌고 숲은 그 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363p中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 간다고 깨달은 진희는 삶에 대해서 진지할 수 없게 된다.
삶의 위선과 비밀을 다 알아버린 아이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어릴 적 누려야 할 당연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본능적으로 터득한 방어수단으로 위악과 냉소를 택한 진희에게서 현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삶의 비밀을 다 알아버리고서도 순수를 유지할 방법은 없다. 다만 위선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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