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로 제출했었던. Modern Art에 관한 생각.

2013. 8. 14. 23:42문화

 

(Tate Modern의 구글이미지. 내부가 더 멋짐.)

 

 2월에 영국의 Tate Modern 이후로는 미술 전시회를 가 본 적이 전무한 것 같다. 그래서 과제로나마 중간에 시간을 내어서 갈 수 있게 된 것이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미술전시회 정보를 찾는 중에 블로그에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립 미술관에서는 ‘너에게 주문을 건다 Spell On You’라는 주제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분당에서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광화문을 지나 시립미술관으로 향하였다. 학교 위주의 생활만 하다가 많은 사람을 보게 되니 그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영상, 설치, 미디어 작품들로 구성된 이 전시회는 무료였다. 혼자 둘러보기 시작했다.


 

 2층부터 시작하였는데 2층에서의 전시는 ‘천 개의 주문들 : 알려지지 않은 친구들의 윤회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이는 소셜네트워크 기술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테마로 구성된 전시였다. 들어서자마자 투명 구체의 중앙에 애플사의 키보드가 있었고, 그 밀폐된 구체 안에는 파리들이 가득했다. 아무런 해설없이, 보자마자 혐오감이 들었는데 지나쳐 생각해 보니 키보드의 브랜드가 애플인데 파리가 꼬인다는 것이 풍자적이기도 하였다. 사과에 파리가 꼬이고 있었다. 나중에 설명을 보니 파리가 키보드에 앉을 때마다 그것이 트위터 메시지에 입력되고 400자를 채우거나 파리가 엔터를 누르면 트위터에 등록되는 식이었다. 이렇게 인간 외의 생물이 만든 임의적이고 무작위적인 메시지는 소셜의 공간에 참여하여 의미없는 의미를 이루고 예술이 된다.

 현대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과거 고전미술은 그 안에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었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 맞아 떨어지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사진이 발달함으로 원작이라는 것의 가치는 사라지고 오히려 어떤 작품들은 사진이라는 복제를 통해서 원작이 만들어지는 하이퍼 리얼리티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회화는 변증법적으로, 다시 점, 선, 면으로 펼쳐지는 퇴보적 진화를 통해 공간을 구성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인상깊었던 작품이 있는데 료타 쿠와쿠보의 <10번째 감상>이라는 설치작품이었다. 불을 밝힌 모형 열차는 선로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어둠 속에 가느다란 빛의 궤적을 남기고 그에 따라 공간 전체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풍경이 고요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부상한다. 설치된 물건들은 다이소 같은 곳에서 구입한 잡동사니들이다. 별 의미가 없는 실체를 통해 그것이 이루는 그림자는 오히려 의미를 이루고 역동적인 현실이 된다. 플라톤이 말한 허구의 그림자 세계는 비로소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상과 현실의 존재는 무너지게 된다. 현실은 무의미하며 현실이 이룬 허상은 하이퍼 리얼리티가 되는 세계가 현실을 잡아먹는다.

 이해하는 듯이 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예술에 대해 쓴 것이 맞다. 과거의 미술은 관중의 참여를 제한하였지만 현대 예술은 관중의 참여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다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뒤샹이 변기를 가져다 놓고 <샘>이라고 이름붙인 작품이 작품인 이유가 다 거기에 있다. 심지어 컨버스에 칼로 찍 그어놓고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Tate Modern에서 이렇게 지껄였었다. ‘현대 예술 나도 할 수 있다.’ 미술전공자인 동료가 얘기했다. ‘피카소가 긋는 거랑, 일반인이 긋는 거랑은 차이가 있다고.’. 그 결과에는 차이가 없겠지만 만든 사람의 아우라와 철학이 그 작품에 존재하는 거란 말이다. 원숭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지 않은 그림에 높은 가치가 매겨졌던 현대 예술을 조롱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렇게 현대 예술은 그 가치의 경계가 무너졌다. 관객이 보기 나름. 이것이 현대 예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감상이 무한한 확장을 한다.  그 외에도 설치된 작품 중에는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이 많이 있었다. 전시회에 온 초등학생들은 이것저것 만져보며 부모님들의 질타를 듣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시립미술관을 나오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잠시 뜰에 앉아서 여기에 온 목적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유아미술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유치원에서 단체 관람을 온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19세 이상만 관람할 수 있는 작품들도 있었고, 단체 관람을 안 받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약 된다고 해도 혼돈의 무질서로 빠질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관람을 하는 성인들은 모두 고상하고 얌전하게 관람을 하였고 그것이 맞는 거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시 뒤집어놓고 생각해 보니 아이들 또한 현대 예술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들이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예술작품에 창의성을 더하고 새로운 시각을 더해주는 일이 아닌가. 오히려 현대 예술은 과거의 예술에 비해서 그 해석이 개방적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다가가기 쉬워야 하는 게 맞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만약 현대 예술을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한다면 굉장히 멋진 작품들이 가득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시작한 교육철학이 궁금해서 잡코리아의 후원을 받아 영국과 덴마크, 이탈리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덴마크에서 보았던 한 프로젝트에는 지역의 예술가가 참여하여 현대 예술을 접목한 프로젝트가 건물 한 공간에 전시되어 있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안무가와 공간 설치 예술가가 협력하여 아이들과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설치된 공간 속에서 따로 또는 함께 공간을 채워가며 역동적이고 정적이기도 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놀이였을 수도 있겠지만 교사가 발문을 통해 그 의미에 대해서 인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굉장히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시립미술관에 온 것은 잘 한 일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깨달음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돌아가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모른 채 간담회를 가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홍대에서는 북페스티벌을 하고 있었는데, 간담회를 가는 길에 그냥 축제로 발걸음을 향하고 만다. 일반 프로그램은 다 끝났지만 한 쪽에서는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관객의 참여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인디밴드의 공연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인디밴드 또한 비주류라고 하지만 개인의 취향의 문제이다. 현대 예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피카소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이 해석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게다가 유명이 가지는 아우라 또한 존재할 것이다. 인디밴드도 유명한 인디밴드가 있지만 비주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유명은 제거되고 취향만이 남을 수도 있을 거다. 아이들에게는 유명의 아우라는 없고 취향만 남을테니까. 그러니까, 현대예술을 통해 교육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이들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즐거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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